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항거: 유관순 이야기 (문단 편집) == 실제 역사와의 차이점 == 역사적 인물이라 최대한 재현하려 노력했기에 오류가 많지는 않다.[* 그러나 실제 역사를 완전히 따라가진 않으며, 그러다보니 이후에 개봉했던 <[[1919 유관순]] - 그녀들의 조국>과 같이 보면 더 좋다는 평이 많다. (항거 : 유관순 이야기는 2월 말 개봉, 1919 유관순은 3월 중순 개봉이었다.) 왜냐면 <항거: 유관순 이야기>와 <1919 유관순>은 똑같이 유관순 열사의 서대문감옥 투옥시기를 다룬 영화인 것은 맞지만, 전자는 가상의 인물 추가-일부 인원 생략 등의 픽션이 약간 가미가 되어있는 것은 맞으며, 전체적인 서대문감옥 8호 감방의 수감자들보다는 [[유관순]], 김향화, 권애라 이렇게 3명의 독립운동가에 포커스가 집중되어 있는 편이다. 후자의 경우 재현극화가 들어있긴 하지만, 전체적인 내용은 [[3.1운동]] 당시부터 유관순 열사 포함 [[서대문형무소|서대문감옥]] 8호 감방에 투옥된 모든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기록을 역사 자료와 함께 따라가는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그러니까, 두 영화는 제작사, 제작자는 다르지만, 내용 자체의 면에서 상호보완이 충분히 되긴 하다는 것. 또한 <항거:유관순 이야기>에서는 마지막 크레딧 부분에 역사 자료가 따로 얹혀진 형태로 나오지만, <1919 유관순>에서는 장면 중간 중간에 [[하희라]]의 나레이션과 함께 사료 자료가 나온다.] * 유관순의 두 남동생 유관복-유관석이 나오지 않았다. * 유관순의 오빠 [[유우석]](아명: 유관옥)은 1919년 4월 1일 병천에는 없었고 [[충남]] [[공주시|공주]]에서 [[영명고등학교|영명학교]] 교사, 졸업생, 재학생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체포 후 공주지방법원에서 실제로 받은 형량은 징역 6월이다. 출옥 후에도 아내이자 독립운동가인 조화벽과 함께 독립운동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는데, 자세한 설명은 [[유우석#s-2|유우석 문서의 2번 항목]] 참조. * 정춘영(鄭春永)은 실존 인물이고, 1919년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 판결문에는 정수영(鄭壽永)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춘영이라는 이름은 후일 개명한 듯하다.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에 남은 유일한 정춘영에 대한 기록으론 해방 후 [[충청남도]] [[서천군|서천]] [[장항읍]]에 본적을 두고 여관업을 운영했다고만 알려져 있고 그 뒤는 알수없다. 1949년 [[반민특위]] 당시 나이가 55세로 1895년생이라고 추측하고 유관순을 고문한 것과 영화 마지막에 자막으로 [[반민특위]]에 잡혔으나 처벌받지 않았다고 언급된 것은 전부 사실이다. 단, 실제로는 [[충청남도]] [[천안시|천안]] [[병천면]] 헌병 주재소의 보조원이었고 그 곳에서 취조를 하면서 악행을 저질렀다.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90307010003|#]]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dh_013_1949_08_08_0080|#]] 하지만 영화에서는 [[서대문형무소|서대문감옥]]의 헌병 보조원으로 각색했다. 그리고 유우석과 그 동료가 자전거를 타는 정춘영을 급습하여 폭행하려 하지만, 정춘영은 "나도 조선인이며, 고향에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비굴하게 애걸한다. 유우석은 정춘영의 자전거를 몽둥이로 박살내는 것으로 대신 분풀이를 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오류는 보통경찰과 헌병경찰이 분리되지않고 혼재되어 나온다는 점이다. 헌병경찰제도가 시행되는 시절인데 조선인 헌병보조원은 헌병복장이나 그 위의 일본인들은 보통경찰의 복장이다. 실제대로라면 헌병보조원은 헌병대의 지시를 받아야하는데 여기서는 보통경찰의 지시를 받는데 아무리 조선인 헌병보조원이라지만 천황 아래 황군이라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부리던 군인에게 경찰이 명령을 내리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건 대표적인 고증오류. 영화에 등장한 유관순의 수인번호 '371'은 1965년 당시 신문보도용 사진[* 1965.3.26 「유관순양 사진, 치안국에서 발견」 『동아일보』 3면]에서 처음 발견된다. 이건 사료적 오류에 해당된다. 이 숫자는 당시 일본 측이 서대문 형무소 수감자 사진 원판 보관용에 적어놓은 일련번호이다.[[http://www.koreanhistory.org/8206|#]] 선교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의 전기에 의하면 유관순의 수인번호는 '1933'으로 적시된다. 이 숫자는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에서도 확인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